『연애의 시대』는 문학평론가 권보드래가 한국 근대문학에 등장한 ‘연애’라는 감정의 형성과 전개를 통해 근대적 개인의 탄생과 감정의 변화를 분석한 탁월한 비평서입니다. 이 책은 단순히 사랑의 역사나 연애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연애라는 감정이 어떻게 근대성의 산물로 등장했는지, 그 감정이 개인과 사회, 문학의 어떤 긴장을 만들어냈는지를 문학작품과 사회사적 배경을 교차 분석하며 풀어냅니다. 연애는 사적인 감정이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사회, 제도, 언어, 정치와 맞물려 있습니다. 『연애의 시대』는 사랑을 통해 본 한국 근대의 자화상이자, 감정의 구조를 통해 사유된 사회문화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근대문학 속 연애의 탄생
권보드래는 연애가 감정 그 자체가 아닌, 역사적 구성물이라는 전제에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그에 따르면 ‘연애’는 근대가 도입되며 처음으로 말해지기 시작한 감정으로, 개인의 욕망과 선택이 가족, 신분, 계급 같은 전통적 가치보다 우위에 놓이기 시작할 때 등장한 문화적 산물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연애는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과 함께 등장합니다.
1910~1930년대 한국 문학에서 연애는 종종 파멸과 저항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개인이 사랑을 선택하는 순간, 그는 종종 가족의 질서나 식민지 체제, 혹은 유교적 윤리를 거스르게 되고, 결국 고통이나 비극을 겪게 됩니다. 이는 연애가 단지 낭만적 감정이 아니라, 새로운 자아의 등장과 낡은 질서의 충돌이라는 근대적 긴장의 표현임을 보여줍니다.
대표적으로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나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이광수의 『무정』 등은 연애가 문학에서 처음 다뤄지는 방식과 그 갈등의 양상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작품들에서 연애는 개인의 선택으로서의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억압과 제약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감정으로 그려집니다. 이것이 바로 ‘연애의 시대’가 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연애의 시대』는 이처럼 한국 근대문학이 연애라는 감정을 통해 어떤 시대적 모순과 긴장을 포착해왔는지를 정밀하게 해석해주는 비평서입니다.
사랑과 자유의 충돌
이 책의 중심 질문 중 하나는 “연애는 자유로운가?”입니다. 권보드래는 연애가 개인의 감정이자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수많은 사회적 코드와 규범,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고 말합니다. 연애는 사적인 감정처럼 위장되어 있지만, 그 속에는 시대의 윤리와 규율, 성역할의 기대가 교묘히 숨어 있는 ‘사회적 제도’입니다.
그는 연애가 여성에게 더 큰 위계와 제약을 강요해왔음을 지적합니다. 근대 문학 속에서 여성의 연애 감정은 종종 ‘위험한 감정’으로 묘사되고, 그 감정을 표현하거나 추구한 여성은 낙오자, 타락자, 혹은 희생자로 끝맺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 남성은 연애를 통해 자아를 확장하거나 사회적 성공의 동기로 삼는 구조가 많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연애 감정조차 젠더 권력의 틀 안에서 작동해왔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연애는 식민지라는 정치적 상황과도 연결됩니다. 연애라는 사적인 감정이 식민지 현실에서는 도피처 혹은 저항의 은유로 작동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하는 현실, 사랑이 금지되고 분열되는 서사는 바로 그 시대의 억압된 현실을 은밀히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종종 ‘자유의 실패’로 끝맺습니다.
『연애의 시대』는 사랑이 결코 감정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이유를 밝히며, 사랑의 언어 안에 감춰진 시대적 억압과 권력의 흔적을 냉철하게 추적하는 작업입니다.
한국적 근대성과 감정의 정치학
권보드래는 연애를 ‘감정의 정치학’이라는 프레임에서 해석합니다. 연애는 감정이지만, 그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고, 누가 말할 수 있으며, 어떤 조건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되는가는 명백히 정치적 문제입니다. 이 감정은 민족, 계급, 성별, 언어라는 구조 속에서 재구성되고 통제됩니다. 연애는 곧 ‘근대인의 형식’이자 새로운 감정체계의 실험장이 됩니다.
그는 특히 한국 근대문학이 서구적 연애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조선 사회의 전통 윤리와 결합하여 복잡한 하이브리드 형태를 형성했다고 분석합니다. 이로 인해 한국 문학 속 연애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전통과 근대, 자아와 공동체, 욕망과 윤리 사이의 충돌과 조율의 장으로 기능합니다. 감정은 단순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훈련되고 구조화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입니다.
또한 그는 ‘연애의 언어’를 통해 문학의 형식 변화도 설명합니다. 낭만적 대사, 편지, 고백, 침묵 등 연애 감정의 표현 방식은 문학 서사의 변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연애는 그 자체로 문학 언어의 실험이며, 새로운 서사의 동력이자 인물 형성의 매개이기도 합니다.
『연애의 시대』는 근대 한국 문학의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감정인 ‘연애’를 중심으로 감정의 역사와 문학의 언어를 교차 분석한 탁월한 문화비평서입니다.
-마치며
『연애의 시대』는 사랑이라는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감정을 통해 한국 근대 문학과 사회의 모순을 통찰한 심도 깊은 인문학적 작업입니다. 권보드래는 연애라는 감정의 이면에 작동하는 역사, 이데올로기, 언어의 층위를 차분히 해체하며, 그 안에서 인간과 사회, 문학의 복잡한 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이 책은 한국 근대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 감정의 사회사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철학적으로 성찰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높은 밀도의 지적 자극을 제공합니다. 『연애의 시대』는 사랑을 읽는 방식이 곧 시대를 읽는 방식임을 보여주는, 감정의 인문학이자 문학의 사회학입니다.